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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주는 것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교육에 관련된 여러가지 과목을 배우면서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 내지 분노의 감정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교사라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목, 소양들을 배워가며 어린시절에 만났던 교사들이 떠올랐다.

누구나 기억에 남는 좋은 선생님이 한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운이 나쁘게도 단 한명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르치는 기술이 좋았던 선생님은 기억나지만 사람 자체가 좋았다고 느껴지는 선생님은 없었다.

 

학창시절 늘 궁금했던 것은 월급 받고 단지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선생에게 굳이 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스승의 날 꽃을 달아드려야 하는 가였다. 

나에게 해준 일이라곤 필기할 내용들을 빼곡하게 칠판에 적어주고 관심도 없는 자기 자식 자랑이야기를 늘어놓는 일들 따위였는데 내가 왜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안됐다. 

 

교회에 다니는 교사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정말 막연한 것이었다.

지식 전달 외에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그나마 지식전달이라도 잘해준다면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교사의 자질, 교사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생각들, 덕목들 이것들이 기독교적으로 읽힌다면 '영성'이 아닐까 싶다.

훌륭한 교사, 잘 가르치는 교사로 인정받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영성'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고 있는 사람 사이의 느껴지는 분위기, 무언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느낌, 교사와 학생이 함께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이 느껴 질 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느낀다. 

 

그렇다. 지금껏 만나온 선생님 중 좋은 사람이 없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들에게 '영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배우는 나는 영성이 있었는가?

나 또한 배움에 있어 영성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어떻게 영성있는 교사와 학생이 만나 좋은 배움을 이룰 수 있을까?

파커팔머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그 답을 주고 있다.

그는 말한다.

'진리를 알기 위한 도구는 감각과 이성을 뛰어넘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다른 자아를 만나 관계를 맺을 때 온전한 실제를 알 수 있다.'

 

실재라는 것의 궁극적인 구조는 존재들의 유기적, 상호 관계적, 상호 반응적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성과 단순한 사실로만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유기적 공동체에 참여할 때 상호적 앎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된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포함한 참된 열정은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모든 것들을 사랑의 형상으로 다시 묶어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동기를 가진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을 다시 정의내리게 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그것이 참된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든 것을 사물로 만들어버리는 객관주의에 대항하는 것에서 비롯된 주관주의가 말하는 것이다. 

객관주의는 자신의 진리만 신경쓰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각 자아를 고립시키고 공동체를 이룰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모든 것은 관계 가운데 이루어져 있기에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나 또한 그 연결고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을 위해서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 사이에서 인격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다한 응답을 하며 공동체를 재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돌아가 그 동안 만났던 교사들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이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상호관의 관계가 없었다는 것, 교사도 내 말에 관심이 없고 나도 교사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르치고자 하는 욕구와 배우고자 하는 욕구 이면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환대, 사랑함이 없었기에 그 시간과 그 공간에서는 어떠한 재창조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함, 사랑함, 이해와 환대를 가지고 단순히 전달이 아닌 서로 소통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참된 진리를 추구할 수 없을 것이고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모두를 고립시키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