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분석의 도전
성서에서 유래한 용어나 문장을 현대 기독교교육의 기초로 활용하는 바람에 많은 문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신앙언어의 논리적 위치를 일부라도 확인하기 위해 현대 언어분석의 연구결과를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언어분석(linguistic analysis)은 언어를 맥락에 따라서 검증하고, 활용하고, 그리고 의미에 접근하려고 철학적 도구를 활용한다. 언어분석에서 종교적 주장에 대한 것은 기독교적 신념의 소통과 관계있는 모든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본래 부정적 일부 연구결과들은 종교언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경
고의 구실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들은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주장들을 보다 더 창조적으로 그리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활용하도록 조언한다.
초기의 언어분석
1920년대 후반, 빈(Vienna)에서 모임을 갖던 과학적으로 훈련된 철학자 집단은 명제를 최소화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언어의 적절한 활용에 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언어분석은 낱말의 활용과 의미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언어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는 주장이었다. 첫 번째는 “장미는 장미이다.”와 같은 진술처럼 언급된 내용이 논리적으로 참에 해당하는 동어반복(tautologies)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의미가 검증에 활용되는 종합적 혹은 비분석적 문장, 가령 누군가 “밖에 비가 내린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밖을 내다보거나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을 수 있다. 따라서 의미경험을 통해서 검증될 수 있는 문장들만이 타당성을 갖는다.
초창기 언어분석학자들에게 다른 유형들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의미경험으로 문장을 검토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정서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도 문자적으로는 “무의미(nonsense)”라고 부른다. 시, 종교 및 형이상학적 사고나 윤리적 원리들은 예외 없이 이런 범주에 해당해서 참 주장들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런 관점은 에이어(A. J. Ayer)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비중 있게 서술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감각내용의 어떤 유형을 경험한 것이지만, 이것이 어떤 초월적인 신에 관한 진술을 검증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데 완벽하게 동의할 용의가 있었다.
또 다른 측면은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의 원리이다. 어떤 사람이 경험의 증거나 전통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떤 유형의 증거가 이 신념을 반증할 수 있을까? 앤터니 플루(Antony Flew)가 서술하듯이 믿는 사람은 신념이 “무수한 검증 때문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검증을 시작한다.” 플루에 의하면 대다수 종교 사상가들은 두 가지 결론들을 역설이나 혹은 인식되지 않은 모순으로 한꺼번에 소유하려고 시도하는데 이것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설명했듯이 이중사고(doublethink)의 한 가지 형식이다. “이중사고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소유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적인 당사자는 자신이 현실을 희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중사고를 활용함으로써 현실을 침해하지 않은 것에 만족한다.”
이러한 모순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신앙을 통해서 인식한다.”는 것 한 가지 이다.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이렇게 묻는다. “신앙을 소유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토머스 맥퍼슨(Thomas Mcperson)은 이런 관점을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무의미였다.”라는 진술로 요약한다. 그는 신비적인 경험은 표현이 불가능한 것의 경험으로 간주하고 종교적 신념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데 동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맥퍼슨은 종교를 친구로 대하고 신학을 적으로 삼으라고 주장한다. 종교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그리고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동일한 범주로 분류하면서 “나-당신의 관계”는 분석을 시도할 때 자취를 감추는데, 이는 바로 그 순간에 “나-그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마틴 부버 역시 논의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들은 일차적으로 부정적이다. 이런 내용들은 비판적인 과학적 사고를 철저하게 훈련받은 학생들이 유사한 부정적 결과가 포함된 종교적 신념에 축어적인 감각경험의 범주들을 적용하고 싶어 할 수 있다고 모든 교사들에게 경고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기능적 분석
언어철학자들은 엄격한 검증의 규칙에 의존하는 것을 아주 제한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사실 문장들은 엄격한 경험적 결론과 동일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의미가 전달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분명하게 파악하고서 가능성이 있는 여러 언어게임(language games)을 목록으로 작성했다. 이것을 통해 문장들이 활용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질서 혹은 범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언어게임은 종교적 주장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 그것은 일련의 규칙에 따라서 언어의 활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게임들은 가족유사성이 존재하지만 서로 무관할 수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언어의 기능적 분석을 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언어라는 것은 삶의 형식을 바탕에 두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종교인이 발언할 때에는 자신의 삶의 형식, 생활방식에서 보여야 하는 의미를 반영한 언어를 활용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언어는 일련의 규칙이 있다. 운동경기에서 규칙을 지켜야 경기가 제대로 이루어지듯이 언어를 활용할 때에도 규칙을 지켜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언어의 의미는 검증이 아니라 활용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세속적인 언어들을 활용하여 의미를 좀 더 분명히 하는 일도 가능하다.
브레이스 웨이트는 활용에 따라서 의미의 원리가 변형되는 것을 수정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진술은 검증할 수 없기에 이 논제를 논의에서 배제하고 종교적인 주장을 도덕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의견을 제기하였다. 진술 자체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특수한 방식으로 활용되기에 그것이 경험적인 명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가 시도한 것은 아가페적 생활방식을 추종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종교적 주장을 모두 도덕적 진술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가 요구하는 행동방침을 잘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으로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교사는 도덕적 의도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어떤 이야기든지 할 수 있다.
부활절 사건
반뷰렌은 블릭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종교적 언어를 설명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 뒤에는 항상 블릭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블릭은 그릇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무의식에 근거하는 어떤 기본적인 확신을 지칭하는데 활용되는 용어로서 외부에서 제기한 공정한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참여나 깊은 관심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든 블릭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설명한다. 반뷰렌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앙의 언어는 하나님과 무관하더라도 의미가 있다. 이미 복음이라는 블릭에 사로잡혔고 그 블릭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세계 안에서 자신의 상황을 직접 거론하는 사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 뷰렌은 예수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가족, 율법, 권위 등 다양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웠고 자신을 위해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위에 관해서 자유롭게 거론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이웃에게 자유로웠다. 예수 안에서 블릭이 작동하고 있었기에 그는 어떠한 요구에도 영향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부활 사건 이후 제자들은 변화 되었다. 그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밖에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예수의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원해서 그 자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어떤 일을 겪으며 그것을 포착한 것이다.
교육을 위한 가치들
반뷰렌은 하나님 사후의 기독교교육이라는 논문에서 교사는 기독교 이야기를 가르치고 , 신앙과 지식간의 관계를 명료화하고, 믿음과 삶 간의 관계를 명료화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반뷰렌의 기독교교육에 대한 생각에서는 이야기를 이야기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반 뷰렌은 미술과 비교함으로 이 문제의 해결책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주 다양한 언어게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언어분석에 대한 이런 접근에서 파생된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교사는 학습자가 7세 무렵부터 언어 활용의 상이한 범주들을 인식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여럿에게 지지를 받은 로널드 골드먼의 연구는 사춘기가 시작되고 난 이후에야 추상적 명제들에 관해서 그리고 특히 유비적이고 이미지와 무관한 개념들에 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습자들이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어게임들은 많다. 내가 만일 “창문을 닫아주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명령이다. 명령어는 검증의 한계를 벗어나서 의미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 28:19) 라는 구절은 성서에 기록된 명령이다.
“나, 존은 메리, 당신을 나의 부인으로 맞이합니다.” 라고 존이 말하면, 그 말은 무엇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 존재하지 않으면 결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장애도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그 말은 행동이다. 그 말이 공개적으로 완성되고, 그러면 성직자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 언어는 수행적이고 자기 참여적이며, 앞으로 확인하겠지만 기독교교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는 상당히 수행적인 진술이다.
종교적 경험은 신비의 영역으로 안내하고, 그리고 침묵이 유일하게 가능한 답변일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해명을 시도하고 그래서 이 때문에 아주 유용한 방법에 가끔 포함되는 역설을 활용하게 된다. 존 위즈덤은 역설을 “언어 침투의 증상”라고 불렀다. 그런 경우에 언어가 작동한다. 결과가 역설을 해소하지 못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세계관, 형이상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또 말한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세계관은 경험적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는 한 사물을 바라보는 합리적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은 하나님을 의미의 중앙, 즉 핵심어로 삼는데 도움이 된다.
b기독교교육의 기초는 이야기, 신화, 전설, 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청소년기에 있을 수 있는 언어와 그 의미에 관한 공격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념이 자기 자신의 신념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혼란 가운데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브랜드 블랜셔드에 따르면 “언어는 무한, 혹은 자유, 혹은 인과관계, 혹은 실체, 혹은 보편적 실재들을 탐구할 수 있는 아주 희미하고 가물대는 가느다란 초이다. 언어로는 설명 가능한 폭이 좁다는 것이다.
이미 1928년에 헨리 위맨은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우리는 종교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라는 낱말에 관한 공통의 이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낱말이 의미하는 것에 관한 온갖 유형의 다양한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가 단지 그 낱말을 추방하는 것으로 문제를 끝낼 수 있다면 별다른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교육의 성격
마크 벨스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교육과 학교수업을 따로 구분해야 한다. 학교는 지역사회의 관심, 요구, 그리고 목적의 반영물이라서 건강, 스포츠, 예절, 시민정신,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교육이라고 할 수 없는 학생들의 복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한다. 교회학교 역시 예배와 같은 활동들 이외에도 교화가 포함된 어떤 목적의 틀 안에서 유사한 관심사들을 소유할 수도 있다.
벨스는 교육을 “학습자들에게 길러진 개념들과 능력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지능의 고안물로서 개념들을 창조하는 방법들을 취급하는데, 어떤 분야에서든지 이런 방법들이 활용된다. 교육은 질문하지 않았던 질문,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문제들에 집중하는 질문을 제기하고 대답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사고력의 개발, 상징의 조작, 그리고 인간을 지칭하는 행동과 발언, 탐구, 그리고 묘사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확인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즉 교육은 지식 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탐구 및 추론을 통한 지식과의 자유로운 문답으로 설명 되어 질 수 있다.
벨스는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⑴ 확장(expansiveness), 혹은 해방의 추구는 연구의 토대를 확대하는 것이고 설익은 결론들을 배격하는 것이다.
(2) 탐구(exploration)는 경험할 수 있고 읽고 쓰는 능력을 더 많은 정보의 소재로 간주하게 하는 모든 것을 활용한다. 탐구는 비교하고, 시험하고 그리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수반해야 한다.
(3) 분석(analysis)은 구조와 의미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어릴 때 길러줄 필요가 있다.
또한 벨스는 교육의 기능을 보조적(supportive), 보존적(preservative), 그리고 숙고적(deliberative) 기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구조화할 수 있다.
보조적 기능 |
1. 관찰 혹은 지각하는 능력 |
2. 기호나 상징의 조작하기 |
|
3. 도구 기술하기 |
|
보존적 기능 |
4. 기억하기 |
숙고적 기능 |
5. 추론하기 |
6. 시험의 구성과 수행하기 |
종교교육에서 교육이 이뤄질 때 가끔 4단계에서 멈출 때가 있다. 성구암송이나 교리 문답에는 능하지만 배운 것에 대한 의구심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설명만이 이뤄진다. 어느 교육과정에는 “대답에 능한 사람”이나 성직자가 최고로 “대답에 능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교사 지침에 이것을 경고하기도 한다. 남을 돕거나 준비시키거나 혹은 지시하는 사람으로서의 교사는 제아무리 능숙한 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교수 행위를 통해서 학생이 지속적인 학습자로 서 자신에 충실할 수 있게 관찰하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고 계발하도록 요구하게 된다.
위에 마크 벨스가 이야기한 교육을 어떻게 “기독교적” 혹은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하나의 분과로서 교육이 적용될 수 있는 주제가 존재한다. 둘째, 개별적인 요소가 전체적인 그림을 이룰 수 있도록 연구되는 대상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함축하고 있다. 셋째, 그것은 연구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경험적으로 근거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다. 넷째, 교사 그리고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학습자까지 신자들이 형성하는 공동체의 고귀한 구성원들이다. 따라서 헌신을 조장하는 교육의 과정 그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양육적인 분위기가 존재한다.
벨스는 이야기한다. 종교를 설명하기에는 종교적 언어로만으로는 언어철학자 및 신학에 대해 공부를 한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 유희가 아닌 기독교교육철학적 언어를 섭렵해야 기본적인 교사의 자질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론
지금까지 언어와 성서에 대한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했다. 초기에는 논리적 실증주의로 성서에 다가가서 많은 학자들이 검증에 총력을 기했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성서를 이해 할 수 없는 한계점을 깨닫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로 끝을 마치는 것 같았다. 결국 성서와 언어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되어버린다. 그러나 언어만큼 성서를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유용한 재료는 없는 것 같다. 성서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를 잘 배합하여서 우리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를 활용하여 교육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지식 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토론의 장을 열어놓고 빠져야 한다. 그레이트 디베이터스의 톨슨 교수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몇일 전에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후배를 만났다. 나는 단지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가르치려는 학생보다는 똑똑해야 하고, 당신의 인생의 롤모델과 말을 섞기에는 충분히 똑똑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당신이 교육자라면 무엇을 가르치려는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교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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